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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라이프

임진왜란 첫 해전, 사거리에서 승리의 해법을 찾다(下)

리얼타임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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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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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빛

23,030

이순신의 상황 분석, 그리고 그의 전략 이순신 장군이 참전한 최초의 전투 옥포해전玉浦海戰은 1592년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경상도 거제현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순신의 말대로 이 해전은 승리를 확인하기 위한 전투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0일만의 첫 출전이었다. 그동안 이순신은 수군 진영에서 병사를 훈련시켰고 무기를 준비했다. 또한 왜군의 장단점을 분석했고 아군의 장점을 강화했다. 즉, 이순신은 20일동안 출전 시기를 견주고 있었다. 왜군과의 첫 번째 전투에 선상 전투는 없었다. 왜군은 바다를 건너왔지만 수군보다는 육군이 강했다. 준비한 배도 이동을 목적으로 만들었고 조총도 육지전 용도였다. 그들은 조선을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결판 낼 생각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러한 배경을 알고 있었다. 이순신은 왜군의 부족한 부분과 조선 수군의 강한 부분에서 답을 찾았다. 근접전은 불리했다. 멀리서 치는 방법만이 승리의 주요 요인이었다. 

 

이순신은 ‘옥포해전’ 외의 다른 전투에서도 비슷한 전략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왜군의 약점을 확실히 파악한 덕분이었다. 화력을 바탕으로 한 전투에서는 사거리가 긴 무기가 한 수 먹고 들어간다. 권투시합에서 팔이 긴 선수가 유리한 것처럼 말이다. 왜군에 대한 분석 결과 수군은 화력을 앞세워야 했다. 조총의 사거리는 화살보다 짧았고, 화포보다는 더욱 더 짧았다. 총통은 창작하는 무기에 따라 사거리를 달리 할 수 있는 유용한 무기였다. 1,200보나 날아가는 대장군전은 적의 심장을 멈추기에 충분했다. 이순신 장군은 23전 23승의 대기록을 이루었다. 무기 별 사거리, 전투선의 재질과 특징, 적의 침략 목적 등 종합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진행한 분석은 연전 연승의 밑거름이 되었다. 

 

왜군의 군선인 세키부네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얇은 재질로 만들어졌고,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강한 소나무 재질로 탄탄하게 건조되었다. 이것도 중요한 사실이었다. 조선의 배가 더욱 더 단단하니 그냥 부딪치기만 해도 적의 배는 부서질 것이 뻔했다. 옥포해전을 마친 그날 저녁, 왜군이 근처에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순신은 쉬는 병사를 독려해 웅진 합포에 있던 적선 5척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는 판옥선의 튼튼함을 무기로 왜선을 들이 받아 부수는 작전을 펼쳤다. 이순신은 쉽게 적을 장악하고는 숙영지로 돌아왔다. 이 전투만 봐도 그가 무기나 전투선 그리고 적군에 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미리 이길 수 있는 전략을 만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기는 자에게는 뭔가 다른 것이 있다. 그 다름의 중심에는 사실을 기반으로 준비된 데이터와 종합적인 환경 분석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무기 분석

 

이순신은 총통을 이용한 원거리 전투를 주로 했다. 근접전에 강한 일본군을 이기는 방법은 총통으로 적의 전함을 멀리서 파괴하고 왜군의 기를 꺾는 것이었다. 일본 전함에 비해 덩치가 큰 판옥선은 많은 무기와 화약을 싣기에 유리했다. 총통은 대포에 해당한다. 여기에 탄환이나 미사일 모양의 무기를 장전하고 발사한다. 적에게 날아간 미사일과 포탄은 배에 구멍을 뚫거나 폭발하면서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전투 방식이다. 다음 표는 당시 사용된 주요 화포의 제원과 장착될 무기의 사거리 데이터다. 조종이나 화살에 비하면 상당히 먼 거리를 날아갈 수 있다. 현재는 다 보물로 지정 관리 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왜군이 들고 온 무기는 사거리 100보에 지나지 않는 조총이었다. 이는 화살이 날아가는 150보에 비하면 3분의 2 수준이다. 

 

캡처.jpg

 

 

전투선 비교 분석

 

판옥선은 임진왜란 2년 차인 1593년의 보유량이 약 200여 척에 육박했을 정도로 대량으로 운용되었다. 전체 조선 수군 전력에서 판옥선이 차지하는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판옥선은 조선 전기의 주력 군함이었던 ‘맹선’에 갑판 한 층을 더해 3층으로 제작되었다. 1층 주 갑판은 포판 용도였고 그 위에 ‘상장’이라 부르는 2층 갑판을 두어 지휘소로 사용했다. 포판 아래는 격군格軍이 노를 젓는 곳과 탄약과 무기를 보관하는 곳, 그리고 휴식을 취하는 선실로 구성되었다. 판옥선은 조선의 바다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으며, 특히 화력전과 당파에 적합했다. 길이가 20~30m로 일본 전함보다 길었고, 선체도 높아서 일본군의 특기인 배에 기어올라 전투하는 방식을 무력화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일본군은 칼과 창으로 싸우는 근접전이 특기였으나, 조선은 화포와 활 등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는 전투 방식이 특징으로, 판옥선은 이에 걸맞는 전투선이었다. 판옥선은 소나무로 만들어졌으나, 배 앞부분은 강도가 아주 높은 상수리나무나 졸참나무와 같은 참나무 계통을 사용했다. 덕분에 상대편 배를 부딪쳐서 부수는 작전에 당파撞破와 같은 작전에 유리했다. 이순신은 당파의 위력을 확인하기 위해 배로 밀어붙이는 작전으로 합포해전을 마무리 지었다. 왜선은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쪽이 나서 바다로 가라앉았다. 이 일로 아군의 사기는 한 층 더 올랐다. 이후 당파는 해전 곳곳에 활용되었다. 

 

판옥선의 배 밑바닥은 편평한 구조였다. 때문에 물 아래로 덜 잠기지만 저항이 커서 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지형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장점이었다. 밀물과 썰물이 많고 암초가 많은 바다 지형 때문이다. 당시 일본 군함은 ‘아다케, 세키부네, 고바야’의 세 종류가 사용되었다. 제일 큰 배는 아다케였고 주로 장군이 타며 지휘부로 활용했다. 고바야는 30명 정도 탈 수 있는 소형 배로서 이동할 때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초반에 집중적으로 벌어진 해전에서 주로 활약한 배는 세키부네關船였다. 세키부네는 삼나무나 전나무를 재료로 해서 매우 얇은 판재로 제작되었다. 배 밑바닥은 뾰족한 평저선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우리나라 해안에서는 많은 불리했다. 규격을 보면 길이도, 높이도 판옥선에 비해 작았다. 이순신은 왜군과 아군 배의 특징을 확연히 이해하고 전투에 임했다. 현지를 살피고 현물을 조사한 축적된 데이터 분석의 결과다.

 

 

명량대첩,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다

 

영화 ‘명량’에는 명량대첩의 생생한 전투 장면이 나온다. 감독이 재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순신은 주변 환경의 데이터를 적극 활용할 줄 알았던 인물이다. 명량대첩은 울돌목(명량해협鳴梁海峽이라고도 함.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의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의 있는 해협)이라는 특수 지형 속에 적선의 배치와 재질을 염두에 둔 전투였다. 이순신이 삼군수군통제사로 복귀했던 당시, 13척의 함선으로 200척(유성룡의 『징비록』 기준)의 적과 싸워야 했다. 그는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명량해협에 위치한 울돌목을 골랐다. 

 

왜 울돌목이었을까? 여기에는 지형에 대한 데이터가 큰 역할을 했다. 울돌목은 깊이가 평균 2m, 길이가 1.5km에 폭이 500m인 해협이다. 폭 500m 중 양쪽 가장자리 50m는 수심이 낮아서 전함의 접근이 어렵다. 특히 왜선은 배 하단이 뾰족하기 때문에 바닥에 닿을 수 있다. 이를 고려하면 항해가 가능한 폭은 400m로 좁아진다. 게다가 울돌목 지역은 해협 중간에 위치해 있어 바위에 턱이 많다. 이 근처라면 왜선은 50m 정도도 접근하기 힘들다. 이제 항해가 가능한 폭은 300m로 줄어든다. 양쪽 90m 지점에는 수심 1m 깊이에 바위 턱이 자리잡고 있어서 배가 좌초될 수 있다. 여기까지 고려하면 항해 가능한 폭은 120m로 줄어든다. 결국 폭이 500m이지만 결전은 120m 폭에서 치뤄야 했다. 함대가 분리될 수 밖에 없고, 분리되다 보면 결국 이순신의 대장선과 접전을 할 배의 숫자는 대폭 줄게 된다. 기상 데이터도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주변에 사는 원주민이 설명한 울돌목 근처의 조류 특징에 대한 정보가 승리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조류는 음력 9월 중순을 기준으로 밀물과 썰물이 6시간 단위로 바뀐다고 했다. 물살의 변화, 이것은 좋은 정보였다. 이순신은 이러한 해협의 특징과 물살의 변화를 이해하고 전략을 수립했다. 명량의 접전이 있던 날 새벽, 물살은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지만 11시가 되면서 물살은 조선 해군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다음은 물살의 변화를 당시 상황에 비추어 적어 본 것이다(https://bit.ly/2PMR7Zq 참조). 오전 6시 30분, 서북방향 썰물 발생, 왜군이 어란진에서 명량까지 쉽게 도착했다. 오전 11시, 이순신의 대장선과 왜군의 단독 접전 발생, 여전히 물살은 밀물로 왜군에게 유리했다. 오전 12시 21분, 물살이 동남방향의 썰물로 바뀌었다. 밀물이 썰물로 바뀌며 왜군의 배는 우왕좌왕했고, 대장선은 물길을 제대로 탔다. 역전의 시간이다. 후방에 있던 남은 12척의 배가 합류하며 왜선을 공격하여 대승리. 물살은 썰물로 아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200여 척의 전투선을 몰고 온 왜군은 130척을 4개의 군단으로 나누 어 명량해협으로 들여보냈고, 70척은 후방에 대기시켰다. 

 

이순신은 울돌목 에서 포를 쏘며 다가오는 적을 막았다. 뒤에 빠져 있던 아군의 배들도 전세가 전환되자 배를 앞으로 내세우며 전투에 참가했다. 그즈음 물의 방향이 바뀌었다. 아군 쪽으로 흐르던 조류가 왜군 쪽으로 세차게 흘러갔다. 밀집되어 있던 왜군의 전함은 서로 부딪히며 부서지기 시작했고, 조선 수군은 그 틈에 화력을 집중시키거나 판옥선으로 왜선을 부수었다. 이순신은 화포 공격과 당파 작전을 병행한 덕분에 왜선 200여 척을 무수히 격침시켰다. 단 13척의 배로 이룬 대승이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 고대 중국의 병법서)에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다. 이순신은 아군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주변 지형까지도 같이 계산에 넣은 치밀한 지휘관이었다. 

 

전투는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한 싸움이다. 주변에 널려 있는 상황 하나하나 허투루 볼 일은 아니다. 병사의 수, 무기의 종류와 제원, 지형, 지물 그리고 조수간만 같은 주변 환경까지 전방위로 고려해야 한다. 인천상륙작전 수행 당시 9월 15일을 D-Day로 정했던 이유도, 미 공군 기상대의 기상예보 분석에 따른 결과였다. 그날이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적은 날이 될 것이란 예측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투루 다룰 정보는 없다. 종합적인 분석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판단이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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